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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4.17
남는 것은 ‘버텨야 하는 시간’
서비스 분야
변호사
“삭제는 되었지만, 삶은 회복되지 않았습니다.”
이 한 문장은 디지털 성범죄 피해의 본질을 압축한다. 흔적은 지워지지만, 일상은 쉽게 돌아오지 않는다. 화면은 사라져도 고통은 남는다. 최근 황정아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대표발의한 「아동·청소년의 성보호에 관한 법률」 일부개정법률안은, 범죄 정황을 인지한 플랫폼 사업자에게 신고 의무를 부과함으로써 이러한 단절을 직시하고 대응의 시점을 앞당기려는 시도로 평가된다.
플랫폼과 범죄 구조의 변화
최근 디지털 플랫폼을 매개로 한 아동·청소년 대상 성범죄는 빠르게 증가하고 있다. 유죄 판결 사례 분석에 따르면 채팅 등을 통해 가해자를 인지한 비율은 2017년 15.3%에서 2023년 36.1%로 두 배 이상 증가하였다. SNS와 메신저는 이제 범죄의 주요 경로가 되었다. 여기에 더해 인공지능 기술의 발전은 범죄 양상을 더욱 변화시키고 있다. AI로 생성된 아동 성착취 영상이 전년 대비 약 260배 증가하면서, 범죄는 촬영과 유포를 넘어 ‘생성’의 단계로 확장되었다.
특히 한국의 상황은 심각하다. 학교와 대학, 군대 등 일상 공간에서 딥페이크 이미지가 대량 유포되고, 피해자의 92%가 청소년과 20대 여성으로 나타났다. 이는 디지털 성범죄가 특정 집단을 반복적으로 겨냥하는 구조로 고착화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제도의 진전과 여전히 남은 공백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내 법제는 이러한 변화 속도를 충분히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 해외 주요국은 이미 플랫폼 사업자에게 신고 의무를 부과하고 수사기관과의 연계 체계를 구축하고 있으나, 국내는 플랫폼 사업자의 법적 책임이 제한적이고 대응 체계 역시 분절적으로 운영되고 있는 실정이다. 특히 생성형 AI를 활용한 성착취물에 대해서는 이용자 단계까지 포괄하는 규율이 미비하여 새로운 법적 공백이 발생하고 있다.
이번 개정안은 이러한 공백을 보완하기 위한 의미 있는 출발점이다. 플랫폼 사업자에게 신고 의무를 부과하고, 민사상 책임 면제를 통해 신고를 유도하며, 신고센터를 중심으로 수사와 피해자 보호를 연계하려는 구조는 의미 있는 진전이다.
디지털 성범죄, 2차 가해의 굴레
현장에서 마주하는 현실은 더욱 무겁다. 디지털 성범죄는 한 번으로 끝나지 않는다. 한 번의 유포는 반복과 확산으로 이어지고, 피해자는 사건이 아니라 ‘지속되는 상황’을 견디게 된다. 특히 아동·청소년은 스스로 대응하기 어려운 상태에서 피해를 겪으며, 그 영향은 성장 과정 전반에 깊이 남는다.
더 큰 문제는 그 이후다. 학교와 일상 속에서 이어지는 시선과 소문, 반복되는 2차 가해는 피해자를 다시 침묵 속으로 밀어 넣는다. 보호받아야 할 존재가 오히려 스스로를 숨기고 움츠러들게 되는 구조가 만들어진다.
결국 이들에게 남는 것은 ‘버텨야 하는 시간’이다. 잘못이 없음에도 스스로를 탓하고, 관계를 피하며, 미래를 주저하게 되는 시간이다.
삶을 지켜내는 법의 역할
이제 법은 사건의 종결을 넘어, 삶의 회복까지 책임져야 한다. 삭제와 처벌만으로는 멈춰버린 시간을 다시 흐르게 할 수 없다. 피해자가 더 이상 숨지 않아도 되는 구조, 말해도 괜찮은 환경, 끝까지 보호받을 수 있다는 확신이 제도로 보장되어야 한다.
디지털 공간에서 시작된 고통이 현실의 삶을 무너뜨리지 않도록, 법과 제도는 그 마지막 순간까지 함께해야 한다.
삭제로 끝나는 법이 아니라, 삶을 다시 일으켜 세우는 법. 그것이 지금 우리가 반드시 만들어야 할 방향이다.
URL: 남는 것은 ‘버텨야 하는 시간’ < Here Law < 칼럼 < 오피니언 < 기사본문 - 법률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