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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9.21

클래리티 법안과 별개로 국내 입법을 서둘러야

미국의 가상자산 입법 상황이 다시 불확실해졌다. 9월 15일 미국 상원에서는 클래리티(CLARITY) 법안의 심의에 들어가기 위한 절차적 표결이 찬성 49표, 반대 50표로 부결됐다. 법안이 최종 폐기된 것은 아니지만 앞으로의 처리 일정을 예측하기 한층 어려워졌다. 미국 시장이 가상자산에 미치는 영향을 생각하면 국내에서도 그 향방을 주의 깊게 살펴볼 필요가 있다. 다만 이를 이유로 국내 입법까지 늦춰져서는 안 된다. 미국의 결론과 관계없이 지금 우리가 먼저 정비해야 하는 과제가 적지 않기 때문이다.
 

클래리티 법안은 디지털자산의 분류와 증권거래위원회(SEC), 상품선물거래위원회(CFTC)의 감독권 배분을 정비하고, 거래소와 중개업자 등의 영업 기준을 마련하려는 법안이다. 그 내용은 국내 입법에도 유용한 참고가 될 수 있다. 그러나 미국 내에서 어떤 기관이 어떤 자산을 감독할 것인지는 미국의 법률 체계에서 풀어야 할 문제이기도 하다. 한국은 법률과 감독 구조가 미국과 다른 만큼 미국의 제도와는 별개로 국내 시장에 맞춰 검토해야 한다.
 

국내에서는 특정금융정보법에 따른 사업자 신고와 자금세탁방지 의무에 이어 2024년 7월 가상자산이용자보호법이 시행되면서 이용자 자산의 보관과 불공정거래에 관한 규제가 마련됐다. 그러나 이는 이용자 보호에 초점을 맞춘 부분적인 입법이었다. 이제는 이를 바탕으로 가상자산 발행과 다양한 서비스의 영업 기준을 구체화할 필요가 있다. 자산을 발행해 자금을 조달하거나 새로운 서비스를 제공하려는 기업이 어떤 요건을 갖춰야 하는지 알 수 있어야 투자와 사업계획도 세울 수 있다.
 

예컨대 수탁이나 자문 서비스를 준비하는 기업이라면 필요한 자본과 인력을 미리 파악하고, 어느 절차를 거쳐 영업을 시작할 수 있는지 판단할 수 있어야 한다. 발행인 역시 공개해야 할 정보와 그에 따른 책임의 범위를 알아야 한다. 이런 기준이 불분명한 상태가 길어지면 기업은 인력 채용이나 설비 투자를 미루게 되고, 국내 사업을 보류하거나 제도가 마련된 해외 시장을 먼저 검토할 가능성도 커진다. 입법 지체로 인하여 기업은 중요한 사업 기회를 놓치게 되는 것이다.
 

입법 지체는 행정지도에 의존하는 현재의 규제 방식도 장기화시킨다. 새로운 위험에 대응하기 위해 행정지도가 필요한 경우는 있지만 법률로 정해야 할 영업의 허용 범위까지 당국의 입장이나 비공식적인 요구에 좌우된다면 이른바 ‘그림자 규제’가 계속될 수밖에 없다. 사업자는 무엇이 허용되는지 예측하기 어렵고, 이용자 역시 서비스 이용이 제한되는 근거와 기준을 알기 어렵다.
 

금융당국에도 이러한 상황은 부담이 된다. 정책의 근거와 적용 기준이 법령에 충분히 담기지 않으면 유사한 사안을 일관되게 처리하거나 정책 변경의 이유를 투명하게 설명하는 데 한계가 생긴다. 새로운 서비스를 허용할 수 있는 범위가 불분명하면 당국도 보수적인 판단에 머무르기 쉽다. 사업자의 의무와 이용자의 권리, 당국의 권한과 절차를 법률로 구체화해야 정부도 명확한 기준에 따라 정책을 집행할 수 있다.
 

이용자 보호의 내용에서도 아직 정리할 부분이 남아 있다. 현행 가상자산이용자보호법은 이용자의 예치금을 은행 등 관리기관에 별도로 맡기고, 사업자가 파산하면 관리기관이 이용자에게 우선 지급하도록 정한다. 가상자산에 대해서도 사업자 고유의 자산과 분리해 보관하고 같은 종류와 수량을 실질적으로 보유하도록 하지만 반환청구권에 관해서는 예치금과 같은 명시적인 우선 지급 규정을 두지 않았다. 평소 자산을 분리해 보관하도록 하는 의무가 도산 상황에서 이용자의 권리로 어떻게 이어질지까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보관 중인 가상자산을 파산재단에서 분리할 것인지, 이용자의 반환청구권에 우선권을 인정할 것인지는 국내 민사법과 도산법에 맞춰 검토할 사안이다. 계약과 보관 방식에 따라 이용자의 지위가 달라질 수 있어 일률적인 규정을 두기는 쉽지 않다. 그렇지만 적어도 사업자에게 자산을 맡긴 이용자가 어떤 보호를 받을 수 있는지는 지금보다 분명해져야 한다. 이러한 문제는 미국 법안이 어떻게 처리되는지 기다리기보다 국내 거래와 분쟁의 경험을 바탕으로 논의를 진전시킬 수 있다.
 

물론 가상자산은 국경을 넘어 거래되므로 해외 제도와의 조화를 충분히 고려해야 한다. 해외 발행인의 공시를 어디까지 인정할지, 외국 사업자가 국내 이용자에게 서비스를 제공할 때 어떤 요건을 요구할지는 다른 나라의 규제와 밀접하게 연결돼 있다. 국내 기준을 서둘러 정했다가 사업자에게 중복된 부담을 지울 우려도 있다. 다만 해외 제도와 조정이 필요한 부분이 있다고 해서 발행 정보의 정확성이나 고객 자산의 보호에 관한 논의까지 함께 미룰 필요는 없을 것이다.
 

입법 속도를 높이려면 각 쟁점의 검토가 어느 단계에 있는지, 무엇을 더 결정해야 하는지부터 공개적으로 논의할 필요가 있다. 다른 법률이나 법안과의 충돌 여부를 검토하는 데 시간이 걸리는 규정은 충분히 심사하되, 독립적으로 시행할 수 있는 부분은 먼저 적용하는 방안도 검토할 수 있다. 디지털자산을 포괄하는 통합법안으로 처리하더라도 업종별 시행 시기를 달리 정하고 하위법령과 인가 심사 기준을 병행해 준비한다면, 법률 통과 이후 실제 제도가 작동하기까지 걸리는 시간을 단축할 수 있다.
 

영업 기준을 정할 때에는 사업별 위험의 차이도 반영해야 한다. 고객 자산을 직접 보관하고 거래를 체결하는 사업자에게 필요한 자본과 내부통제를, 자산을 보관하지 않는 자문업자나 기술서비스 제공자에게 그대로 요구하기는 어렵다. 업무의 실질에 따라 규제 범위를 정하고 그에 맞는 요건을 마련해야 기업도 새로운 제도 아래에서 영업의 허용 범위를 예측하고 합리적으로 사업을 준비할 수 있다. 입법을 서두르는 목적에는 이용자 보호와 함께 이러한 새로운 사업 기회를 열어 주는 일도 포함돼야 한다.
 

클래리티 법안의 논의 과정에서 참고할 내용은 계속 살펴보되 국내 입법은 우리가 해결해야 할 과제를 중심으로 진행할 필요가 있다. 해외 제도의 변화를 반영할 여지를 두면서도 그 전에 이용자의 권리와 사업자의 영업 기준을 정하는 일은 충분히 가능하다. 국내 이용자와 기업이 이미 겪고 있는 불확실성을 고려하면 국회와 정부가 구체적인 법률안과 심사 일정을 제시하는 작업을 더 서둘렀으면 한다.

출처 : https://www.decenter.kr/article/2009297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