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O EN
닫기

뉴스레터

2026.03.27

거래소 법인 계좌, 법인이 아닌 거래소를 규제하라

로드맵의 경과와 현황
금융위원회는 2025년 2월 13일 「법인의 가상자산시장 참여 로드맵」을 발표하며 법인의 단계적 시장 참여를 공식 정책으로 채택했다. 1단계로 비영리법인과 가상자산사업자의 현금화 목적 계좌 발급을 허용하고, 2단계로 주권상장법인 및 전문투자자로 등록한 법인의 투자·재무 목적 거래를 시범 허용하겠다는 구상이다. 2025년 하반기 시행을 목표로 제시했으나, 관련 가이드라인은 2026년 현재까지 확정되지 않은 채 논의가 지속되고 있다. 국내 가상자산 투자자 1,000만 명 중 99.99%가 개인이며, 법인이 배제된 시장에서 76조원 이상의 자금이 해외 거래소로 유출된 것으로 집계된다. 정책의 지연이 투자자 보호로 이어지지 않는다는 점은 이미 수치로 확인된다.

 

 

전통 금융 기준의 부적절한 이식
현행 로드맵이 설정한 2단계 허용 기준의 핵심은 자본시장법상 전문투자자 요건이다. 자본시장법 시행령 제10조 제3항 제16호는 신청일 전일 기준 금융투자상품 잔고가 100억원(외부감사 대상 주식회사의 경우 50억원) 이상인 법인을 전문투자자로 규정한다. 금융당국은 이 기준을 충족하는 법인이라면 가상자산 시장에서도 충분한 위험감수 능력을 갖추었다고 보는 것으로 보인다.

 

이 전제에는 두 가지 결함이 있다.

 

첫째, 전통 금융투자상품 보유 규모가 가상자산 시장의 위험감수 능력을 대리한다는 논리적 연결이 성립하지 않는다. 가상자산은 가치 평가 방법론, 가격 변동성의 구조, 유동성 리스크의 성격, 기술적 위험(해킹, 스마트 계약 취약점, 오입금)이 전통 금융상품과 본질적으로 다르다. 주식 포트폴리오를 100억원 보유하는 법인이 반드시 비트코인이나 알트코인 시장의 구조를 이해한다고 볼 근거는 없다.

 

둘째, 전문투자자 제도 자체의 설계 목적이 다르다. 이 제도는 원래 적합성 원칙, 적정성 원칙, 설명의무 등 판매 규제를 완화하기 위한 것이지, 특정 자산 시장의 접근 자격을 심사하는 도구로 설계된 것이 아니다. 가상자산 시장 참여 자격 기준으로 전용하는 것은 제도의 목적 범위를 벗어난 용법이다.

 

여기에 더해, 법인은 그 설립 목적과 실질이 매우 다양하다. 제조업 상장법인, 블록체인 기술 기업, 가상자산 운용을 목적으로 설립된 법인, 외국법인의 국내 자회사는 법인이라는 형식만 공유할 뿐 자금의 성격, 지배구조, 내부통제 수준이 전혀 다르다. 현행 기준은 이 다양성을 상장 여부와 금융투자상품 잔고라는 두 가지 지표로 일률적으로 처리한다. 이 두 지표가 개별 법인의 가상자산 거래 적정성을 포착한다고 보기 어렵다.

 

 

해외 현황 - 규제의 주체는 거래소
EU의 MiCA(Markets in Crypto-Assets Regulation)와 미국, 홍콩의 가상자산 규율 체계는 공통적으로 법인의 거래소 접근 자체를 제한하지 않는다. 이들 체계에서 규제의 핵심 주체는 법인 투자자가 아니라 가상자산사업자(VASP)다.

 

MiCA 체계 하에서 VASP는 법인 고객을 수용할 때 일반 고객에 비해 강화된 고객확인(Enhanced Due Diligence)을 수행해야 한다. 실질적 수익자(Ultimate Beneficial Owner) 확인, 자금 출처 검증, 거래 목적 확인 의무가 VASP에 집중된다. 법인이 이 검증을 통과하지 못하면 거래소는 해당 법인과의 거래 관계 자체를 거부해야 한다. 미국 FinCEN의 BSA 체계와 홍콩 VASP 라이선스 제도도 동일한 구조를 취한다. 법인 투자자의 자격을 사전에 제한하는 것이 아니라, 거래소가 개별 법인을 실질적으로 검증하도록 의무를 부과하는 방식이다.

 

이 구조는 두 가지 측면에서 효율적이다. 규제 비용과 책임이 전문 역량을 갖춘 기관에 집중되고, 감독 당국의 집행 대상이 수천 개의 법인 투자자가 아니라 소수의 거래소로 수렴된다. 자금세탁방지 관점에서도, 개별 법인의 사전 자격 심사보다 거래소 단계에서의 실시간 거래 모니터링이 실효성이 높다.

 

 

규제 방향 전환의 필요성
현행 로드맵의 설계는 방향이 반대로 설정되어 있다. 법인 투자자 자격을 사전에 걸러내는 구조를 유지하면서, 정작 거래소의 법인 고객 검증 의무는 명확하게 규정하지 않고 있다. 필요한 것은 법인의 진입 장벽을 정교하게 높이는 작업이 아니라, 거래소에 실질적인 검증 의무를 부과하고 이를 위반했을 때의 제재 구조를 명확히 하는 것이다.

 

구체적으로는 세 가지가 필요하다. 거래소의 법인 고객 실질적 수익자 확인 의무 명문화, 법인 유형별 위험도 분류 기준 마련, 이상거래 모니터링의 법인 거래 적용 기준 설정이다. 이 세 가지는 법인의 시장 참여를 억제하지 않으면서도 자금세탁방지와 시장 질서 보호라는 규제 목적을 달성할 수 있는 경로다.

 

법인 계좌 허용 논의가 지연될수록 규제의 공백은 해외 거래소가 채운다. 이 공백이 투자자 보호로 이어지지 않는다는 것은 이미 수치가 말해준다. 가상자산 시장에서 법인을 어떻게 다룰 것인지의 문제는, 결국 규제의 축을 어디에 놓을 것인지의 문제다.

 

문 앞에서 자격을 심사할 것인지, 아니면 문 안에서 거래를 검증할 것인지 - 그 선택이 한국 가상자산 시장의 신뢰성을 가르는 분기점이 될 것이다.